카불 탈출(?)- 여기는 두바이 2006/09/14 <7>

두바이로 나왔다. 이곳 시간 9월 14일 밤 10시정도...

사실 카불에 며칠동안 있으면서 햇볕 뜨겁고, 먼지 많고, 테러의 위험도 있고...여러가지로 삶의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의 관문인 카불 공항에서 기분 상하는 일들이 조금 있었다.
공항 직원이든 경찰이든 가는 곳마다 트집을 잡아 뒷돈을 요구하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그럴까...우리나라도 전쟁 후에 꼭 이랬을 것 같기도하고...
용서하기로 맘먹었다.

어떻게 표를 구해 예정보다 하루 먼저 두바이로 나올수 있었다.
두바이로 나오니 신호등도 있고..폭주하는 차도 없고, 거기다가 도로에 차선도 있고...중앙선을 넘어다니는 차들도 없고, 총가진 사람도 안보이고.
한국분이 하시는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 밥도 맛나게 먹고, 씻고,
방에 올라와 인터넷을 하는데 무선으로 연결했는데도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
-카불에서는 클릭 한 번 하고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했어야 했는데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다.
컴퓨터를 켜고 처음 한 일은 '린이 블로그' 에 들어가 린이가 노래 부르는 비디오를 봤다.
혼자 미소 짓다가 눈물이 찔끔 났다.

달동네 이야기 - 두번째 Kabul, Afghanistan <4>

달동네 이야기 - 두번째 Kabul, Afghanistan <4>

이렇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다.
나에게 이곳은 최악의 환경이지만 이들에게는 최선이며 어떠한 비교대상도 알지 못한다.
내가  또 내 아이가 느끼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만족도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나는 또 내 아이는, 과연 서울의 그런 환경에 행복해 하고있나?

환경이라는 요소가 행복을 재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알기에
그래도 그들이 행복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아빠로 보이는 이가 줄줄이 아이들을 달고 내려오다가
산동네로 오르는 나를 세우더니 씨익 웃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한다.
이내 포즈를 잡고 사진 몇장을 찍었다.
사실 내가 그들에게 찍은 사진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자체를 즐거워한다. 내가 카메라 액정 화면으로 찍은 사진의 모습을 보여줘도 그것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산 위에 사는 아이들은 비교적 아랫쪽에 있는 공동 수도나 무물에서 물을 길어나른다. 어린 나이에도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해야한다.
아이가 서있는 뒤쪽 터널의 위에 맛 수드 장군 의 사진이 붙어있다. 맛수드는 북부동맹을 이끌던 반탈레반 세력의 수장이었는데 많은 이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그는 2001년 9월 9일 ..9.11 테러가 있기 이틀전 탈레반(?)에 의해 암살되었다. 우리가 이곳 달동네에 오른 날도 바로 그의 기일이었다. (혹자는 맛 수드의 암살이 9.11 테러의 전조였다고도 한다.) 이 날 카불에서 가장 큰 운동장에서 맛 수드 장군의 추모 집회가 열렸고 카르자위 대통령등 요인들도 참석했다. 다행히 불행인지 이날은 카불에서 별다른 테러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날 9월 8일 미군을 포함한 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가 미 대사관 근처에서 있었고..)
김영철 PD, 카빌 운전기사, 코디네이터 박재복 선생, 기훈석 PD,그리고 나...
달동네 마을에서 ..사진 한 장 찍다.

달동네 이야기 - 첫번째 Kabul, Afghanistan <3>

달동네 이야기 - 첫번째 Kabul, Afghanistan <3>





카불
도시 한가운데 2000m 넘는 높은 산이 있고 도시 주위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난민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유입되면서 그들이 공간이 부족했다. 그들의 선택은 바로 산이었다. 아래서 계획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흙벽돌집들은 어느새 급경사의 꼭대기까지 빼곡히 들어찼다. 문제는 하수와 화장실 오물의 처리인데, 현재는 그냥 방치 상태이다.



이곳의 가장 좋은 놀이는 어른 아이 없이연날리기이다. 언제든 바람이 불고, 연은 싸게 있다. 덕분에 하늘에는 항상 예쁜 색깔의 연들이 떠있고, 아프간의 현재 사정 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마다 주인 잃은 연들이 매달려 있다.



이곳에서 만난 비둘기 아저씨….우연히 만났지만 이곳 사람들은 금방 친구가 된다.

산꼭대기에서 차까지 얻어마시고, 그가 키우고 있는 예쁜 비둘기들의 공연도 있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도 폭탄 냄새가 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Kabul. Afghanistan <1>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Kabul. Afghanistan  <1> 2006 09 08

밤늦게 인천을 출발해 두바이를 거쳐 이곳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했다.
첫날 도착 직전 터진 자살 폭탄으로 19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쳤다. 탈레반 또 이곳 저곳에서 자신들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정말 누구의 짓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 현정부와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소행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 이러한 혼란 상태가 유지되길 바라는 세력들이 있음 또한 분명하다.
심지어 그 혼란이 유지되길 바라는 세력중의 하나가 미국이다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하는 이야기다.

마치 1945년 광복 후..그리고 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모습과도 많은 부분 닮아있다.

이곳사람들에게 이러한 자살 폭탄, 미사일 등은 아주 일상화 된 일이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이곳 아프간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쳐다봐선 안된다. 물론 사진이나 비디오도 촬영해선 안된다. 아차 실수로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이곳에선 해서는 안되는 일이 너무 많다.
반디가르가 호수 이곳 카불사람들의 휴식처- 금요일(휴일)이라서 사람들이 많았다.

흙 벽돌 만드는 열 네 살의 사내 아이

직접 흙을 반죽하고 나무틀로 다섯 장 씩의 흙 벽돌을 찍어낸다.
1000장을 만들어 팔면 9달러 정도의 매출
…하루에 그정도 판단다. 하지만 물론 딸린 식구가 많다.

이 아이의 꿈이 뭐냐 물어봤더니 커서도 계속 이 일을 하는 거란다.
이 아이에게 세계는 이 벽돌 몇 장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잘생긴 젊은 친구
결혼 피로연의 악기 연주자들...결혼 하객들도 남자들은 신부의 얼굴은 보지 못한다. 물론 우리들도 보지 못했다.
이곳 카불 주면은 어디나 사막 같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서 농사지을 땅도 없고....하지만 아이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양고기를 파는 사람

아프간의 풍선장수 어느 상을 받은 작품의 제목인데..이곳 아프간에 아직도 풍선 장수가 있다.


거의 내가 촬영한 사진의 대부분을 차를타고 이동하면서 찍은 것들이다. 어쩔수 없지뭐...쩝!

졸졸 물이 흐르는 곳에 세차장이 있다. 물론 유료다.
세차를 해도 먼지가 워낙 많아..금방 더러워질텐데...

PCO라는 곳-  휴대전화를 빌려 통화하는 곳이다. 많은 저개발 국에서는 유선전화보다 이동전화가 먼저 발달한다. 유선망을 구성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곳 무덤은 무슨 쓰레기장 같다. 동네 마다 한쪽에 이런 무덤이 있다. 전쟁통에 죽은 사람들이 저 안에 누워있다.  작고 넙적한 돌 몇 개로 이곳에 누군가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그리고 누더기로 된 깃발들 몇개... 무덤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돌들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작은 소리로...